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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파리에서 위르트까지 마망의 시신을 운구한다(장 루이 그리고 장의업체의 기사와 함께). 점심 식사 때문에 차는 투르 뒤편에 있는 소리니의 아주 작고 단순한 음식점에서 정차한다. 기사는 오트-비엔으로 시신을 운구하는 "동료" 기사를 만나서 함께 식사를 한다. 장 루이와 잠깐 그곳 주변을 걷는다(보기 싫은 전사자 기념비). 단단하게 다져진 땅, 비 냄새, 초라한 시골 마을. 문득 다시 찾아드는 생의 충동(부드러운 비의 향기 때문인가), 그날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편안함, 마치 짧게 지나가는 어떤 경련처럼.


11.29


나는 독백 속에서 AC에게 나의 슬픔에 대하여 설명한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혼돈스러운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하여. 그래서 나의 슬픔이 흔히 말해지는,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그런 슬픔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정신분석학적인 슬픔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변증법적으로 느슨해지고, 조금씩 사라지면서, 마침내 "화해에 이른다." 하지만 나의 슬픔은 그렇게 즉시 정화되지 않는다. 나의 슬픔은, 그와는 반대로, 물러가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AC는 대답한다: 슬픔은 원래 그런 거라고(그러면서 그는 앎의 주체, 수렴의 주체가 된다).

-나는 그 주체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나의 슬픔이 수렴되는 것, 일반화되는 것(키에르케고르)*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나의 슬픔을 훔쳐 가버리는 것 같아서다.


*"내가 말을 하면 나는 이미 일반적인 것을 표현한다. 내가 그걸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키에르케고르, '공포와 전율' 중


1977. 12.27


위르트에서


술을 마시던 중에 설움이 폭발했다.

(버터와 버터통을 사이에 두고 라셸 그리고 미셸과 벌어진 말다툼). 1)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가사를 돌보는" 이 집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일의 고통스러움. 위(U.)의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녀의 일이었고 그녀의 집이었음을 기억하게 만든다. 2) 그것이 누구이든 부부는 일종의 블록, 혼자 사는 사람은 그 밖으로 쫓겨나 있는 성곽이다.


1978. 6.13


사람들은 (예컨대 마음이 상냥한 세베로의 경우) 슬픔의 이유를 아주 당연한 것처럼 일상적인 현상들로부터 찾으려고 하는 광적인 경향성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넌 사는 게 별로 만족스럽지가 못하구나? - 그런데 나의 "삶"은 잘 흘러간다, 아무것도 일상 속에서 모자라는 게 없다: 하지만 아무런 외적인 장애가 없어도, "돌발적인 사건들"이 없어도, 그 어떤 절대적인 결핍의 느낌이 있다: 그러니까 그건 "슬픔"이 아니다. 그건 순수한 비애다-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무엇으로도 상징화할 수 없는 그런 결핍감.


1978. 6.24.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78. 7.29.


(히치콕의 영화를 보았다: <염소자리 아래서>)


잉그리드 버그만(1946년경의 모습):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여배우의 신체는 나를 감동시킨다. 마망을 기억나게 하는 그 어떤 것을 내 마음 안에서 건드려서 깨워낸다: 그녀의 피부색, 지극히 소박해서 아름다운 두 손, 서늘하고 청량한 인상, 나르시시스트적이 아닌 여성성…….


1979. 1. 17


삶의 결핍 상태가 서서히 구체적인 얼굴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새로운 일을 꾸며서 만들어갈 수가 없다(글쓰기는 예외지만). 우정도 사랑도 그 밖에 다른 일들도.


1979.1.18.


그녀의 죽음 이후, 그 무언가를 새롭게 "꾸미고 만들어가는 일"이 싫다. 그런데 글쓰기는 예외다. 그건 왜일까? 문학, 그것은 내게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다(마망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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